<나의 지난 시절의 일부분 얘기> > 자유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회복지법인 DongHaeng 1963 아이들의 행복과 장애로 인한 불편함이
편견이 되지 않는 사회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 게시판
  • 자유게시판

<나의 지난 시절의 일부분 얘기>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Mason할배
댓글 0건 조회 20회 작성일 25-07-30

본문

<나의 지난 시절의 일부분 얘기>

지난 날 내가 중 3때 공납급(월사금)을 못 내어

수업시간에 집에 가서 돈 가지고 오라고 쫓겨나온 일이 있었다.

 

갈 곳도 없고 해서 집 쪽으로 오다보면 큰 산이 있어 거기에 올라가

중턱에 앉아 멍하니 집들만 내려다보다가 학교로 돌아가는 일이 있었다.

집에 가 봐야 뾰족한 수도 없어 그냥 시간만 보냈다.

 

그런 와중에 기말 시험이 있어 치루고 나니 반에서 2등을 했다.

이렇게 되고 나서부터 담임선생이 대신 나의 월사금을 내어주셨다.

 

고마우신 선생님을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 한 것이 졸업 때는 전교 3등을 했다.

이래서 몇 몇 고등학교에서는 장학생으로 받아주기로 한 곳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의 가정 형편이 어려워 교복 사 입을 돈은커녕

내일 아침 밥 걱정을 했어야 하는 형편이라 진학을 못하고

공장에 다니면서 통신강의록으로 검정고시를 치르기로 하고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받아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정말 좋은 선생님, 고마우신 선생님이셨다.

그런데 이젠 그 이름도 모르겠다.

나는 나쁜 아이였나봐...

==

자세한 얘긴 이렇다.

나는 2차 세계 대전 때 일본에서 태어나

45년 해방과 더불어 선친의 고향인 울산으로 왔었다.

 

초등학교 시절 :

7살에 경남 울주군 zzz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126학년 겨울에 단신 서울로 올라가 학교 졸업식을 못 마치고 졸업을 했다.

 

9살부터 12살 까지 한문을 배웠다.

고향 땅 옆에 사시던 난쟁이 아저씨가 가르쳐 주셨다.

그는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겨울이라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지나면

내년엔 더 배가 고프고 추워진다. 내가 한문을 가르쳐 줄 터이니 배워라.

글을 배우면 춥고 배고프지 않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

이 와중에 잊지 못할 부분이 있다.

그 당시는 모두가 살기 어려웠지만 이 집은 더 그랬다.

당시는 난방과 취사가 나무로 하는데 나무가 없어 불을 못 지펴

밥은 겨우 해먹고 나니 늘 방이 차가웠다.

.

해서 우리 아이들은 방이 차서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고 꿇어앉아서 했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다리가 짧아 우리같이 무릎으로 앉질 못하셨다.

참으로 보기 안타까웠다.

 

이 집에 아들이 둘이 있었지만 키가 작아 지게를 질 수가 없어

산에 오르지 못해 나무를 돈을 주고 사다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먹는 것이 말이 아니었다.

이 집엔 소나무 속껍질을 물에 며칠간 불려두었다가

불어나면 여기에 쌀 몇 알을 넣고 죽을 끓여 먹었다.

이러고는 얼굴들이 붓는데 이걸 부황 걸렸다고 했다.

겨울 내내 이렇게 지내다가 봄이 되어 쑥이 나면

이 걸 캐서 끓여먹고는 낳았다.

 

그런데도 그는 우리에게 돈을 받지 않으셨다.

이유는 돈을 받으면 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파는 것이라고 했다.

 

그 아저씨의 덕분으로 나는 12살에 5:1의 경쟁에서 이기고

문교부 사환으로 취직이 되었다.

이 시험은 사환 자리는 하난데 다섯이 지원을 해서

부득이 문교부 인사과장이 추천자들을 배석시킨 가운데

지원자가 신문을 읽게 하는 시험이었는데 난 난쟁이 아저씨한테

2년에 걸쳐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마쳤기 때문에

이 시험에 이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16살엔 밤엔 중학교를 다니면서 낮엔 신문배달을 했고

17살엔 고등학교를 못가고 타이어 공장을 다니면서

도시락과 같이 통신강의록으로 국가 보통고시 공부를 했다.

(야간 근무 시 다들 자는 시간에 공부를 하다가 사장님에게 들켜

잠 안자고 공부를 한다고 혼이 나기도 했다.)

 

18살엔 연필공장에서 일을 했고

19살엔 육군에 지원입대 하여 서울 수색 30사단에 근무 중

61년 박정희 장군이 이끄는 군사혁명이 있었다.

 

이 와중에 나는 중앙청 효자동쪽 정문을 지키는 헌병이 되었다.

이 때 헌병대 짚차가 정문에 서려고 하였는데

브레이크 고장으로 정문을 받으면서 나도 치여

서울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얼마 후 의병제대를 하였다.

 

20살에 제대를 하고 약국에서 일을 하였다.

615/16의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공무원 공채가 시작이 되었는데

부산시청도 지방4급 행정공무원 채용시험이 있어

이에 응시하여 힙격 하였다.

13천 여 명 응시에 2 백 명이 합격되었다.

 

62년 부산시장 김현옥으로부터 공무원 임명장을 받았다.

합격자 중에 중졸은 나 하나였다고 했다.

 

그리고 66년 서울시청으로 전근을 했다.

여기서 현직에 있으면서 야학으로 대학을 마쳤다.

그리고 계속 공부를 해서 사무관 시험도 합격을 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 하셨다.

이로 인해 전두환 정권이 탄생하여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이상 한국에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어

20년 근무한 공직을 발로 차버리고 86년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미국에서 처음에 청소와 목공소 봉제공장을 거쳐

아무래도 영어를 다시 배워야겠다 생각하고

영어 학교와 전자 기술자 학교에 들어가 1년을 배웠다.

졸업 후 전자수리공이 되어 일을 하다가 우연히 책을 쓰게 되었다.

--

무엇이 부끄럽다는 건가?

공장에 다녀서? 못 살아서? 없는 부모 만나서?

부모 형제가 없어서?

바보 같은 소리들 하지마라.

모든 것은 제 하기에 달렸다.

난 이제 8순이지만 매일 17pages의 책을 읽는다.

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단 책을 선별할 수 있어야 한다.

==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믿는 자는 성공하고

자신을 믿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 된다.

영어 한 가지만 잘하면 여러분은 반드시 성공한다.

==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59728] 전남 여수시 연등1길 38
대표자 : 김대환 | 대표전화 : 061-663-3937
팩스 : 061-663-7223 | 사업자등록번호 : 417-82-06547

후원계좌

농협은행 301-0201-2140-71 사회복지법인 동행

기부금 영수증 등 후원내역 관리를 위해서 계좌입금 후 연락 부탁드립니다.